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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북한 체제경쟁은 경제전쟁 번호 393685

남북한의 다른 정치체제는 경제체제의 전쟁을 끌어왔다. 그리고 경제체제 전쟁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유 민주 자본주의 경제인 남한이 북한의 공산 독재 유일사상 체제의 북한을 압도적으로 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군사력의 전쟁은 여전히 경제적 자원을 소모하게 하고 있다. 정치는 경제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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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의 광복은 우리에게 일제로부터 억눌렸던 압박의 기나긴 시대를 지나 민족 자존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기쁨과 환호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분통터지는 남과 북이 갈라지는 반쪽짜리 해방이었다. '무장 일본군 해제'라는 일시적 미봉 조치로 시작된 남북한의 분단은 이후 현재에 이르는 75년간의 남북 전쟁과 대립을 이어오고 있다.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임시로 들어와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진행하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남한이 미국을, 북한이 소련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우연하게도 소련이 북한에 가까웠고, 남한이 미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한에는 미국식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들어섰고, 북한에는 소련식 공산주의 정치체제가 자리 잡았다.

정치체제가 경제체제를 한정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정치는 자원의 분배에 좀 더 신경쓴다면, 경제는 효율적인 생산을 위한 방법론이다. 따라서 정치경제는 효율적으로 생산한 것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분배하자는 것이고, 경제정치는 제대로 분배하기 위하여 효율적으로 생산하자는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하는 가에 따른다. 그리고 생산과 분배의 우선 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은 정치에 있다.

정치의 힘을 발휘하는 가장 큰 수단은 바로 경제이다. 군사력과 같이 보이는 무력은 사용하는 자의 피해도 감수해야 하는  최후의 수단이지, 일상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치와 경제는 따로 갈 수 없는 한 몸이다. 정치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이고,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주권자이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국가에 속한 모든 국민에게 부여하고, 이렇게 부여된 개개인의 권력을 기반으로 현실정치를 실행한다. 반면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구조를 원칙으로 하는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억압받던 계급들의 해방을 주장하고, 그 해방된 주체인 노동자 계급이 주권 계급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한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노동계급을 위한 사회이다. 예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대체로 자유자본주의화 되었고, 공산주의는 공산당 일당 독재에 개인 우상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남한과 북한도 역시 이 정형화된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경제를 운용하는 방식도 남과 북은 처음부터 끝까지 달랐다. 역시 공산주의식과 자본주의식의 다름이었다.

우선 국내 경제는 남한은 시장경제를, 북한은 계획경제를 추구하였다. 경제력은 초창기부터 1970년대 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우월했다. 이는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해방당시 산업 시설이 북한 쪽에 많이 있었고, 천연자원 역시 북쪽에 많았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와 계획 경제의 가장 근본적인 점은 개인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는지의 여부이다. 개인의 사적 재산권을 인정한다 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창의성으로 소유하게 된 자산을 자유의지로 시장에 팔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원이 희소한 세계에서 이기적 개인행동은 결국 경쟁으로 표출되고 시장경제의 자원배분과 소득분배는 그 경쟁의 결과이다.

반면에 계획경제는 개인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정부의 중앙통제기구의 계획에 따라 생산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중앙에서 전체를 통합하여 관리하므로, 극단적으로 소외되거나 극단적으로 편중된 부를 누리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이윤추구 동기가 자극되기 어려우므로 개인의 경제활동참여 의지가 떨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효율이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공산사회주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개인의 사유재산 소유권을 부정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946년 3월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실시, 단 20여 일만에 이를 매듭지었다. 또한 1946년 8월에 주요 산업 국유화 법령을 발표하여 주요 공장, 기업소, 광산, 발전소, 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기관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남한은 경제체제의 변경을 위한 급격한 변혁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대로 사유재산을 인정했고, 개인 간의 경쟁을 권장하는 자유 자본주의식 경제제도를 추구했다. 이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경제는 어려웠다. 워낙 양 쪽의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치의 혼란은 그나마 있던 산업시설과 농업 기반을 망가트렸기 때문이다. 극심한 혼란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양측 모두 가라앉기 시작했다.

남한이 시장경제를 택하고 북한이 소련식 계획 경제 체제를 택한 것까지는 정치 체제의 선택에 따른 당연한 순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한이 개방경제를 택하고 북한이 폐쇄경제를 택한 것은 당시 박정희와 김일성의 선택이었다. 1962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취했다. 흔히 경제성장론을 말할 때 쓰는 '박정희 모델'이다. 이것은 같은 시대 다른 개도국이 택한 산업화 전략과는 매우 다른 전략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개발도상국들은 개도국은 소비재 내지 경공업 위주의 1차 수입대체산업화, 즉 내수 위주의 산업 개발이었다. 그 후에 또 다시 중공업과 생산재 위주의 2차 수입 대체산업화 전략을 취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국산품 애용과 생산'이었다. 그 당시 '수입대체 산업 육성론자'들의 주된 경제이론은 '종속이론'이었다. 종속이론은 이미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부에 있는 선진국들이 나중에 자본주의에 편입된 국가들, 다시 말하면 과거 선진국들의 착취대상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구조적으로 종속되어 지속적으로 착취당하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 와중에 한국,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과 남미의 칠레만은 '수입대체 산업 육성정책'이 아닌 대외 개방을 통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4 마리용은 빠른 시일 내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시스템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반면에 북한의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 전략과 자력갱생론의 결합한 폐쇄경제이다. 북한식 정의에 의하면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노선'이란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경제, 자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자기 나라의 자원과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발전하는 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국가경제의 거시 재생산체계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정책이었다. 그렇지만 북한의 자력갱생론은 한계가 있다. 땅이 좁고 자원이 부족한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지 않는 나라에서의 독자생존은 어렵다.

그 결과는 비슷한 시기에 민족자본을 내세우며 독자 생존을 추구했던 다른 나라들도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이 실패한 것을 보면 정책 선택의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북한의 대외 무역의존도가 낮지는 않았다. 자체 생산력이 워낙 낮고 석유와 같이 외부에서 조달할 수 밖에 없는 자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방경제를 택한 남한이 자유무역을 하고, 계획경제를 택한 북한이 통제무역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남한의 자유무역은 처음부터 교과서적 의미의 자유무역은 아니었다. 자유무역은 미국과 유럽의 선진 민주 자본주의 국가에서 하고, 남한은 민주주의 국가 그룹 내에서 수출은 촉진하고 수입은 억제하는 중상주의적 무역을 했다.

냉전 상황에서 남한은 '반공의 보루'로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다양한 지원을 받았다. 반면 북한은 자립적 민족경제 발전 노선은 소련 및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달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강대국들로부터 '정치적 자주'를 확립하려는 정치적 기획이었다. 북한은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 “생산의 물적·인적 요소를 자체로 보장하고 민족국가 내부에서 생산-소비의 연계가 완결되어 독자적으로 재생산을 실현하는 경제체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비교우위에 특화하는 산업정책이 아니라 가급적 모든 산업 기반을 자국 내에 구비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북한이 냉전시기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국제 분업 체계인 코메콘(COMECON) 가입을 거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북한의 자력갱생 모델은 북중소 북방삼각체제의 불안정한 환경에서 형성되었는데, 1950년대 후반 북한의 자립적 발전 전략은 중소분쟁이라는 사회주의권의 분열 속에서 어쩔 수없이 선택된 면도 있다.

남한과 북한은 정치부터 무역까지 매 단계마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극단적 다름을 취해왔다. 그리고 최소한 글로벌 자유무역 그룹에 속한 남한의 경제체제 우월성에 대한 판단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바로 중국, 구 소련,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과 남한의 무역거래를 개시하는 것이었다. 국가기관이 공산권과 관계를 여는 것이 아니라, 1980년대 말 서로 상대방과의 무역에서 이익을 취하 가능성을 본 무역회사들이 먼저 체제의 우월성을 확인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북한 간의 경제-무역 갈등은 끝이 나지 않았다. 어떤 정치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원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김정은 독재체제를 원하고 있다. 이제 일방적인 남한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한에 전쟁 위협을 통하여 평화를 팔고 있고, 남한은 울며겨자 먹기로 이를 사들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거래가 1990년대와 2000년대까지 이어졌던 남북교역과 개성공단이다. 지금은 끊어졌지만, 미래의 남북 무역관계를 예측해보고, 방법론을 만들 기반이 되는 귀중한 사례이기도 하다.
체제 경쟁은 경제 전쟁

남북한의 다른 정치체제는 경제체제의 전쟁을 끌어왔다. 그리고 경제체제 전쟁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유 민주 자본주의 경제인 남한이 북한의 공산 독재 유일사상 체제의 북한을 압도적으로 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군사력의 전쟁은 여전히 경제적 자원을 소모하게 하고 있다. 정치는 경제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945년의 광복은 우리에게 일제로부터 억눌렸던 압박의 기나긴 시대를 지나 민족 자존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기쁨과 환호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분통터지는 남과 북이 갈라지는 반쪽짜리 해방이었다. '무장 일본군 해제'라는 일시적 미봉 조치로 시작된 남북한의 분단은 이후 현재에 이르는 75년간의 남북 전쟁과 대립을 이어오고 있다.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임시로 들어와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진행하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남한이 미국을, 북한이 소련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우연하게도 소련이 북한에 가까웠고, 남한이 미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한에는 미국식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들어섰고, 북한에는 소련식 공산주의 정치체제가 자리 잡았다.

정치체제가 경제체제를 한정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정치는 자원의 분배에 좀 더 신경쓴다면, 경제는 효율적인 생산을 위한 방법론이다. 따라서 정치경제는 효율적으로 생산한 것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분배하자는 것이고, 경제정치는 제대로 분배하기 위하여 효율적으로 생산하자는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하는 가에 따른다. 그리고 생산과 분배의 우선 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은 정치에 있다.

정치의 힘을 발휘하는 가장 큰 수단은 바로 경제이다. 군사력과 같이 보이는 무력은 사용하는 자의 피해도 감수해야 하는  최후의 수단이지, 일상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치와 경제는 따로 갈 수 없는 한 몸이다. 정치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이고,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주권자이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국가에 속한 모든 국민에게 부여하고, 이렇게 부여된 개개인의 권력을 기반으로 현실정치를 실행한다. 반면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구조를 원칙으로 하는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억압받던 계급들의 해방을 주장하고, 그 해방된 주체인 노동자 계급이 주권 계급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한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노동계급을 위한 사회이다. 예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대체로 자유자본주의화 되었고, 공산주의는 공산당 일당 독재에 개인 우상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남한과 북한도 역시 이 정형화된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경제를 운용하는 방식도 남과 북은 처음부터 끝까지 달랐다. 역시 공산주의식과 자본주의식의 다름이었다.

우선 국내 경제는 남한은 시장경제를, 북한은 계획경제를 추구하였다. 경제력은 초창기부터 1970년대 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우월했다. 이는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해방당시 산업 시설이 북한 쪽에 많이 있었고, 천연자원 역시 북쪽에 많았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와 계획 경제의 가장 근본적인 점은 개인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는지의 여부이다. 개인의 사적 재산권을 인정한다 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창의성으로 소유하게 된 자산을 자유의지로 시장에 팔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원이 희소한 세계에서 이기적 개인행동은 결국 경쟁으로 표출되고 시장경제의 자원배분과 소득분배는 그 경쟁의 결과이다.

반면에 계획경제는 개인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정부의 중앙통제기구의 계획에 따라 생산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중앙에서 전체를 통합하여 관리하므로, 극단적으로 소외되거나 극단적으로 편중된 부를 누리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이윤추구 동기가 자극되기 어려우므로 개인의 경제활동참여 의지가 떨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효율이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공산사회주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개인의 사유재산 소유권을 부정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946년 3월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실시, 단 20여 일만에 이를 매듭지었다. 또한 1946년 8월에 주요 산업 국유화 법령을 발표하여 주요 공장, 기업소, 광산, 발전소, 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기관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남한은 경제체제의 변경을 위한 급격한 변혁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대로 사유재산을 인정했고, 개인 간의 경쟁을 권장하는 자유 자본주의식 경제제도를 추구했다. 이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경제는 어려웠다. 워낙 양 쪽의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치의 혼란은 그나마 있던 산업시설과 농업 기반을 망가트렸기 때문이다. 극심한 혼란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양측 모두 가라앉기 시작했다.

남한이 시장경제를 택하고 북한이 소련식 계획 경제 체제를 택한 것까지는 정치 체제의 선택에 따른 당연한 순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한이 개방경제를 택하고 북한이 폐쇄경제를 택한 것은 당시 박정희와 김일성의 선택이었다. 1962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취했다. 흔히 경제성장론을 말할 때 쓰는 '박정희 모델'이다. 이것은 같은 시대 다른 개도국이 택한 산업화 전략과는 매우 다른 전략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개발도상국들은 개도국은 소비재 내지 경공업 위주의 1차 수입대체산업화, 즉 내수 위주의 산업 개발이었다. 그 후에 또 다시 중공업과 생산재 위주의 2차 수입 대체산업화 전략을 취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국산품 애용과 생산'이었다. 그 당시 '수입대체 산업 육성론자'들의 주된 경제이론은 '종속이론'이었다. 종속이론은 이미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부에 있는 선진국들이 나중에 자본주의에 편입된 국가들, 다시 말하면 과거 선진국들의 착취대상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구조적으로 종속되어 지속적으로 착취당하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 와중에 한국,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과 남미의 칠레만은 '수입대체 산업 육성정책'이 아닌 대외 개방을 통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4 마리용은 빠른 시일 내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시스템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반면에 북한의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 전략과 자력갱생론의 결합한 폐쇄경제이다. 북한식 정의에 의하면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노선'이란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경제, 자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자기 나라의 자원과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발전하는 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국가경제의 거시 재생산체계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정책이었다. 그렇지만 북한의 자력갱생론은 한계가 있다. 땅이 좁고 자원이 부족한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지 않는 나라에서의 독자생존은 어렵다.

그 결과는 비슷한 시기에 민족자본을 내세우며 독자 생존을 추구했던 다른 나라들도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이 실패한 것을 보면 정책 선택의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북한의 대외 무역의존도가 낮지는 않았다. 자체 생산력이 워낙 낮고 석유와 같이 외부에서 조달할 수 밖에 없는 자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방경제를 택한 남한이 자유무역을 하고, 계획경제를 택한 북한이 통제무역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남한의 자유무역은 처음부터 교과서적 의미의 자유무역은 아니었다. 자유무역은 미국과 유럽의 선진 민주 자본주의 국가에서 하고, 남한은 민주주의 국가 그룹 내에서 수출은 촉진하고 수입은 억제하는 중상주의적 무역을 했다.

냉전 상황에서 남한은 '반공의 보루'로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다양한 지원을 받았다. 반면 북한은 자립적 민족경제 발전 노선은 소련 및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달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강대국들로부터 '정치적 자주'를 확립하려는 정치적 기획이었다. 북한은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 “생산의 물적·인적 요소를 자체로 보장하고 민족국가 내부에서 생산-소비의 연계가 완결되어 독자적으로 재생산을 실현하는 경제체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비교우위에 특화하는 산업정책이 아니라 가급적 모든 산업 기반을 자국 내에 구비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북한이 냉전시기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국제 분업 체계인 코메콘(COMECON) 가입을 거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북한의 자력갱생 모델은 북중소 북방삼각체제의 불안정한 환경에서 형성되었는데, 1950년대 후반 북한의 자립적 발전 전략은 중소분쟁이라는 사회주의권의 분열 속에서 어쩔 수없이 선택된 면도 있다.

남한과 북한은 정치부터 무역까지 매 단계마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극단적 다름을 취해왔다. 그리고 최소한 글로벌 자유무역 그룹에 속한 남한의 경제체제 우월성에 대한 판단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바로 중국, 구 소련,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과 남한의 무역거래를 개시하는 것이었다. 국가기관이 공산권과 관계를 여는 것이 아니라, 1980년대 말 서로 상대방과의 무역에서 이익을 취하 가능성을 본 무역회사들이 먼저 체제의 우월성을 확인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북한 간의 경제-무역 갈등은 끝이 나지 않았다. 어떤 정치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원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김정은 독재체제를 원하고 있다. 이제 일방적인 남한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한에 전쟁 위협을 통하여 평화를 팔고 있고, 남한은 울며겨자 먹기로 이를 사들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거래가 1990년대와 2000년대까지 이어졌던 남북교역과 개성공단이다. 지금은 끊어졌지만, 미래의 남북 무역관계를 예측해보고, 방법론을 만들 기반이 되는 귀중한 사례이기도 하다.
홍재화 필맥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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