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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회영지에 대한 과세권과 십자군 전쟁 번호 373042

로마시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313년에 공인한 후 유럽에 가톨릭이 퍼지게 됐다. 476년 로마멸망으로 각국에 있던 주교들은 교황의 지배를 벗어나서 각국 왕들에 의존하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왕은 토지를 교회에 기부 하고 왕의 측근을 주교로 임명했는데, 주교들의 신앙심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교회는 별도의 토지를 기부 받아 교회영지를 확보하고 영지에서 십일조를 징수하면서 부유해졌고 세속화되어갔다.

가톨릭이 유럽에 널리 퍼지면서 교황은 종교적인 권위를 찾고 각국에 있는 주교들을 교황의 지배력 아래 두기 위해 각국 왕들이 행사하는 주교임명권 즉, 성직자 임명권을 교황이 행사하려 했다. 그러자 각국 왕들과 충돌을 빚었다.

이런 다툼을 성직자 임명권투쟁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교황은 각국 왕의 통치행위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교리를 들어서 왕의 통치행위에 간섭을 했고, 한편으로는 종교재판을 각국 주교가 하도록 해서 왕의 통치행위에 중요한 사법권에도 간섭을 하게 되었다.

교황의 성직자임명권에 대해 독일 하인리히 4세가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섰다. 그러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4세를 파문했다. 파문된 독일왕은 할 수 없이 교황에게 가서 3일간 용서를 빈 후 사면을 받았다. 

이 용서를 받은 장소가 카노사인데 이 사건을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본국으로 돌아와 힘을 길러 교황과 전쟁을 벌여서 승리하고 교황은 화병으로 죽게 되었다.

후임 교황 우르반 2세는 매우 전략적인 사람이었다. 각국 왕들과의 성직자 임명권투쟁을 종결시키고 교황의 권위를 확실하게하기 위한 방법으로 비잔틴 제국에서 요청한 지원병 파견에 대해 좀 더 대담한 전략을 수립했다. 그것이 십자군 전쟁 구상이었다.

당초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1081-1118)는 셀주크터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위해 단순하게 구원병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르반 2세는 이 기회에 동서로 분단된 교회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자 했다. 

각국 왕을 교황의 권위 밑에 두기 위해 성지를 되찾고 순례길을 확보하자는 좀 더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이후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전쟁을 선동했다.

겉으로는 성지회복이라는 종교전쟁으로 십자군 전쟁을 외쳤다. 하지만 실질은 교황이 각국 주교를 임명하고, 그 주교로부터 주교 임명 후 1년 연봉에 해당하는 초임세를 확보했다. 결국 각국 교회가 교회영지에 대해 징수하는 십일조 과세권을 주교와 공유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교회영지도 교황의 소유로 두기 위한 음모가 숨어있었다. 이는 각국 왕들과 유럽인들을 이슬람과의 전쟁터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렇게 대담하게 기획한 전쟁범죄가 십자군 전쟁의 본질이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십자군전쟁 결정이 있었던 무렵의 유럽은 봉건제 사회로 운영됐다. 봉건제는 왕과 영주들 간에는 충성서약을 하고 왕이 제후의 땅을 인정하고 이를 지켜주되 왕은 왕 직할지의 생산물로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영주들이 지원금과 병사들을 보낼 의무가 있고 만약 병사를 보내지 못할 경우에는 병역면제세를 납부해 왕이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체제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유럽의 영주들이 별도의 영지를 갖고 별도의 왕국처럼 영지를 지배하자 유럽 각국의 왕들은 십자군전쟁에 영주들을 데리고 전쟁에 참여하면 영주들을 왕의 지배력아래 둘 수 있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십자군전쟁은 교회영지에 대한 과세권장악을 통해 교권을 확보한 후 세상을 지배하려는 교황과 절대주의 국가를 만들려는 유럽의 왕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합작한 음모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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